공짜 커피 한 잔에 내 하루를 통째로 내준 적이 있다. 알아차리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가격표에 0원이 적혀 있으면 따질 것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공짜 커피가 정한 길
우연히 얻은 음식점 쿠폰으로 평소라면 시키지 않았을 비싼 메뉴를 만족스럽게 먹은 적이 있다. 단골 커피숍에서는 도장을 모아 한 달에 두 번씩 꼬박꼬박 공짜 커피를 마셨고, 그게 꽤 쏠쏠했다. 나는 이 시스템을 영리하게 이용하는 쪽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내 하루를 되짚어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하루 종일 골목을 도는 게 일인 사람이, 그 사이 새로 문을 연 카페들을 전부 지나쳐 매번 같은 커피숍으로 차를 돌리고 있었다. 쿠폰의 도장 개수가 나의 동선을 정했고, 커피 마시는 날짜까지 쿠폰에 맞추고 있었다.
공짜 커피는 공짜가 아니었다. 나는 그 값을 발걸음으로 치르고 있었다. 커피숍은 도장 몇 개를 주고 내가 언제 오는지, 얼마나 자주 오는지, 무엇을 시키는지를 가져갔고, 무엇보다 다른 가게로 갈 이유를 가져갔다. 호의처럼 보이던 종이 한 장 뒤에는 그걸 찍어 낸 사람의 뜻이 있었다.
가격표에 0이 적혀 있으면, 값은 다른 곳에 적혀 있다.
생수 한 병짜리 질문
요즘 가장 큰 공짜는 AI다. 무엇을 물어도 몇 초 만에 답이 나오고, 대부분은 돈을 받지 않는다. 화면 속에서는 무게도 없고 끝도 없어 보이지만, 그 답은 어딘가의 거대한 건물에서 나온다. 서버 수만 대가 밤낮없이 돌아가고, 그 열을 식히려고 전기와 물이 쉬지 않고 들어간다.
몇 해 전 미국의 한 대학 연구진은 당시의 AI가 질문 수십 개에 답할 때마다 생수 한 병, 500ml쯤의 물을 쓴다고 추정했다. 기업들은 훨씬 적다고 반박했고, 기술이 발전하며 질문 하나에 드는 물은 실제로 점점 줄었다. 하지만 묻는 사람은 매일 늘어나고, 물은 한정돼 있다.
멕시코 중부의 한 가뭄 지역에서는 2024년, 주민들이 여드레나 보름에 한 번 들어오는 수돗물을 통에 받아 버티는 동안 바로 곁에 세계적인 기업들의 데이터센터가 들어섰다. 그중 한 회사가 받은 물 사용 허가만 한 해 2,500만 리터로, 그 지역 공공용수의 4분의 1에 가까운 양이었다. 회사는 냉각에 물을 쓰는 날이 1년에 며칠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물을 기다리는 주민들 눈에 그 허가증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짐작이 간다.
결정에서 가장 먼 사람
자원이 모자라면 누구 몫부터 줄어드는지, 나는 한 번 본 적이 있다. 2008년 여름, 나는 군 간부였다. 기름값이 치솟자 국방부는 유류 절약 통제를 가장 높은 4단계로 올렸다. 병사들의 온수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 묶였고, 한여름에도 에어컨은 27도 아래로 내려가지 못했다. 관용차든 개인차든 홀짝제로 다녀야 했고, 공용차량 운행은 30%가량 줄었다.
그해 여름 부대에는 온열 환자가 많이 나왔다. 명령을 내린 사람도, 기름값을 올린 사람도 아니었던 스무 살 남짓한 병사들이 그 값을 몸으로 치렀다. 지켜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모자라면 줄어드는 순서가 있었고, 그 순서는 결정에서 가장 먼 사람부터였다.
커피숍 도장이 내 동선을 가져갔듯, 공짜 답은 우리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를 가져간다. 그리고 그 답을 식힐 물이 부족해지면, 그 값은 누구의 몫에서 먼저 나갈까.
아무도 먼저 멈추지 않는 경쟁
어느 나라도 먼저 멈추지 못하는 건, 뒤처졌을 때 치를 값 때문이다. 그 값에는 내 노후도 들어 있다. 국민연금도 주식시장에 들어가 있어서, 경쟁에서 밀려 주가가 무너지면 내 연금도 같이 무너진다. 그래서 나라는 결국 자본과 같은 편에 서고, 그 편에는 나도 서 있다.
나라 전체가 걸린 경쟁 한가운데서, 2008년 여름의 병사들처럼 결정에서 먼 사람들의 몫이 앞 순서에 서기는 어렵다. 불편하지만, 내가 본 구조는 그랬다. 그리고 그 경쟁은 지금도 속도를 올리고 있다.
심판이 줄을 선 날
오랫동안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은 기업에 값을 매기고 상장 수수료를 정하는 심판이었다. 큰 상장이라도 수수료는 1%를 넘는 게 보통이었다.
2026년 6월, 로켓과 위성과 AI를 한데 묶은 회사가 역사상 가장 큰 상장에 나서면서 은행들에 0.7% 남짓한 수수료만 내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세계적인 은행 스무 곳이 넘게 그 줄에 서려고 다퉜다. 스페이스X였다.
규칙을 정하는 쪽이 규칙을 받아 드는 쪽 앞에 줄을 선 장면이었다. 그 회사가 가진 건 발사대와 위성, 그리고 AI를 돌리는 거대한 설비였다. 화폐와 규칙은 새로 찍어 낼 수 있어도, 이런 건 쉽게 복제할 수 없다. 고깃집 골목에서 끝까지 잃지 않은 건 건물을 가진 사람이었다. 같은 일이 훨씬 큰 규모로 벌어지고 있었다.
골목이 죽으면 돈은 다음 골목으로 옮겨 간다. 그 다음 골목이 어디인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서리를 밟을 때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머지않다. — 주역
커피숍 도장은 서리였다. 얇고 가벼워서 밟는 줄도 몰랐는데, 그 얇은 것이 한 장씩 쌓여 내 하루의 길을 굳혔다. AI가 공짜로 내주는 답도, 누군가 공짜로 나눠 주겠다는 약속도 지금은 서리처럼 가볍다. 서리를 밟는 동안에는 아무도 얼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노동이 끝나면 모두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질 거라는 이야기가 요즘 자주 들린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커피숍 쿠폰을 떠올린다. 골목에서 8년을 지켜보는 동안, 위에서 번 돈이 아래로 흘러내려 오는 걸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공짜로 받는 쪽은 언제나 무언가를 대신 내고 있었다.
나는 어떤 회사가 이길지 맞히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세 번의 깡통이 가르쳐 준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부족해질지는 누구나 볼 수 있다. 오늘 AI에 던진 질문 하나의 진짜 값은 어제보다 조금 더 비싸졌다. 자원의 양은 정해져 있으니 당연한 이치다. 아직 화면에 가격표가 붙지 않았을 뿐, 어쩌면 AI를 위해 깨끗한 물을 양보한 이름 모를 누군가가 이미 그 값을 대신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0원이라고 적힌 가격표 앞에서 한 번 더 묻는다. 이 값은 누가 치르고 있으며,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머지않아 AI가 요구하는 에너지가 인간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자원을 넘어서는 기괴한 역전의 순간이 온다면, 자원의 한계 앞에서 인류는 과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어 줄 것 같은가? 규칙을 지배하는 심판들은 지금 어떤 선택을 했는가?
당신은 시스템의 에너지를 통제하는 쪽과 남은 자원마저 헌납하는 쪽, 어디에 서기로 정했는가?
“아니면, 그 선 앞에 선 채 아직도 그것을 정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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