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바쁜 시간에 죄송합니다. OO 팔러 왔습니다. 나중에 다시 올까요?”
“네.”
거절이었다. 나는 이 거절을 들으러 일부러 가장 바쁜 시간에 찾아갔다.
카운터 안쪽에서
20대에 1년 동안 카페를 운영했다. 카운터 안에 서 있으면, 문을 열고 곧장 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은 한눈에 영업사원이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말을 듣기도 전에 마음이 굳었다. 반대로 메뉴판을 보거나 가게 안을 둘러보는 사람은 영업사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손님이겠거니 했으니 마음도 풀려 있었다.
제일 곤란한 건 가장 바쁜 시간에 와서 내 앞에서 머뭇거리며 설명을 길게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주문이 밀려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데 제안이 좋은지 나쁜지는 들리지 않았고, 짜증부터 올라왔다. 거절하고 나면 그 사람이 쏟아 낸 말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거절할 이유로 바뀌었다. 정작 내 거절의 뜻은 단순했는데 말이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
카운터 바깥쪽에서
몇 년 뒤 나는 반대편에 섰다. 영업사원이 되고 보니 동료들은 점심 장사처럼 바쁜 시간대를 피했다. 바쁜 가게에 들어가는 게 미안하다고 했고, 실제로 그걸 실례라 여기는 사장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미안함은 남의 감정이었다. 사람은 타인의 감정에 쉽게 물들고, 영업은 결국 그 공간의 감정을 누가 정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바쁜 시간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어휴, 장사 잘되네요” 하고 가게에 배경음을 하나 깔았다. 그리고 곧바로, 사장님이 아니라 브레이크 타임 안내판에 눈을 둔 채 말했다. “사장님, 바쁜 시간에 죄송합니다. OO 팔러 왔습니다. 나중에 다시 올까요?” 돌아오는 답은 늘 “네”였다. 나는 “다음에 올게요” 하고 웃으며 나왔다.
필요 없다는 말도, 괜찮다는 말도 듣지 않았다. 긍정으로 거절받고 긍정으로 물러나는 일이 아무 감정 없이 쌓여 갔다. 자주 보면 눈에 익고, 눈에 익으면 편해진다.
11시 30분
한번은 거래처 카페 사장님과 점심을 먹었다. 그 카페를 차릴 때 주변 동향과 매출 흐름을 같이 봐 드린 인연이었다. 우리가 간 곳은 근처에서 소문난 식당이었고, 두 사장님은 이미 아는 사이였다. 11시 30분, 가게가 처음 만석이 되는 걸 확인하고 나왔다. 가장 바쁘지만 사장님 기분은 가장 좋은 시간. 그 공간에 나는 한 번 들어갔다 나왔고, 사장님과 아는 사람 곁에 앉은 모습도 보여 줬다.
다음 방문부터가 영업이었다. 문 앞에 서면 들어가기도 전에 미소가 먼저 번졌다. 첩보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고, 영업은 일이 아니라 놀이가 되어 있었다.
다섯 번째 방문. 문을 열자마자 사장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보였다. 사장님에게 나는 아는 사람과 밥을 먹던 사람이었고, 가장 바쁜 시간에 세 번 찾아와 세 번 웃으며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 무렵 사장님은 내가 뭘 팔러 왔는지도 잊었을 것이다. 그날 나는 다른 말을 꺼냈다. “브레이크 타임 시작될 때 올게요.” 네 번째 “네”가 돌아왔다.
어쩌면 대답한 건 관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바쁜 순간을 더 바쁘게 만든 것도 나였지만, 사장님 기억에 남은 건 “네” 한마디로 바쁜 순간을 덜어 준 사람이었다.
브레이크 타임
브레이크 타임에 문을 열자, 사장님이 먼저 “죄송합니다” 하고 말을 꺼냈다. 거래는 그 순간 이미 성사된 셈이었다. 대화는 말을 끝맺는 쪽이 주도권을 가져간다. 제품 설명을 길게 늘어놓으면 질문이 돌아오고, 질문하는 쪽이 마지막 말과 결정을 함께 가져간다.
그래서 돌아오는 답이 “네”뿐이도록 말을 끌어갔다. 카페 사장님 추천으로 와 봤다는 인사, 시장 동향, 요즘 사장님들의 걱정거리. 대화가 조금 늘어져 사장님이 쉬고 싶어질 즈음 가격 이야기를 꺼내고, 생각할 틈 없이 물었다. “내일 가져와 볼까요?” 여기서 “네”는 3초 안에 나와야 한다. 거절이 오면 그동안 내가 한 모든 행동이 거절할 이유로 바뀐다. 어느 쪽이든 내 영업은 거기서 끝이다.
그렇게 가게마다 미묘하게 다른 브레이크 타임을 따라, 카페거리 메인 길의 가게들을 하나, 둘 먹어 치웠다. 이 거리에서 장사하려면 내 허락부터 받아야 한다는 농담이 사장님들 사이에 돌 정도였다.
도장을 찍는 쪽
이 글을 쓰다 보니 그 커피숍이 떠올랐다. 도장 몇 개로 내 동선을 정하던 곳. 이 거리에서는 내가 도장을 찍는 쪽이었다. 사장님의 “네”를 정한 건 나였고, 사장님은 그걸 몰랐다. 쿠폰을 들고 같은 커피숍으로 차를 돌리던 내가 몰랐던 것처럼.
그 거리에서 나는 늘 브레이크 타임에 들어가는 쪽이었다. 시장에서는 아니었다.
단타로 매일 수익이 나던 시절, 일지에는 주간 승률 80퍼센트가 찍혔다. 그때의 나는 가장 느슨했고, 경계할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시장은 나에게 나중에 다시 올까요, 하고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먼저 문을 열어 두었으니까.
환호가 번지면 나도 들떴고, 공포가 번지면 나도 떨었다. 그 공간의 기분을 정한 건 늘 남이었다. 사장님의 “네”를 3초 안에 받아 내던 사람이, 계좌 앞에서는 남이 정한 기분에 3초 만에 “네”를 누르고 있었다. 마지막 날 시장가 버튼을 누른 손도 그랬다.
그칠 때와 갈 때
그칠 때 그치고, 갈 때 간다. 움직임과 멈춤이 제때를 잃지 않으면, 그 길이 밝다.
— 주역
영업사원인 나는 이 문장대로 움직였다. 바쁜 시간에는 웃으며 멈췄고, 브레이크 타임에는 들어갔다. 그런데 계좌 앞의 나는 거꾸로였다. 멈춰야 할 때 달렸고, 버텨야 할 때 던졌다. 남의 때는 그렇게 잘 읽으면서, 내 때는 한 번도 읽지 못했다.
일지에 찍힌 그 승률을 나는 믿었고, 결국 잃는 쪽의 숫자가 되었다. 브라질의 한 대학 연구진이 선물시장에서 단타를 시작한 개인들을 모두 추적한 적이 있다. 300일 넘게 버틴 사람 가운데 97퍼센트가 돈을 잃었고, 경험이 쌓여도 나아지는 흔적은 없었다.
시장은 내가 잃었다고, 거절당했다고 동정하지 않는다. 얼음처럼 차갑게 모양을 바꿀 뿐이다. 그 차가운 곳에서 내가 아는 생존법은 하나뿐이다. 남이 정한 기분에 “네”를 누르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며 조용히 내 때를 기다리는 것. 지금 나는 그 기다림을 기분이 아니라 달력에 맡겨 둔다. 겁먹은 날에도, 모두가 문을 닫고 떠난 날에도, 그 날짜가 나를 다시 시장 앞에 세운다.
진짜 때는 모두가 긴장을 푸는 환호의 시간에 오지 않는다. 환호가 끝나고, 모두가 문을 닫고 떠난 뒤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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