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앞에서 세상은 공평하다. 억만장자에게도 거리의 빈자에게도 하루는 똑같이 24시간이고, 누구든 끝에 가서는 똑같이 죽는다. 자연은 누구에게도 25시간을 주지 않고, 누구의 죽음도 면제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눈을 통장으로 돌리는 순간 이 평등은 산산조각 난다. 밤을 새워 정직하게 번 돈은 물가에 갉아 먹혀 점점 줄어드는데, 남의 시간과 노동을 빌려 쓴 자본은 복리로 불어난다. 똑같이 24시간을 사는데 한쪽은 더하고, 다른 쪽은 곱한다.
고깃집 골목의 2년, 그리고 1년
영업사원으로 8년을 일하며 골목 하나가 태어나고 죽는 걸 여러 번 봤다. 시작은 늘 비슷했다. 골목 안쪽의 고깃집 하나가 잘되기 시작하고, 웨이팅이 길어진다. 그 줄을 노리고 옆에 고깃집이 하나 더 들어서고, 또 하나가 들어선다. 그렇게 2년쯤 지나면 이름 없던 골목이 고깃집 골목이 되어 있었다.
골목이 유명해지면 건물주가 움직였다. 월세를 터무니없이 올려 가게를 내보내고, 인테리어를 새로 한 뒤 본인이 직접 장사를 시작했다. 골목을 만든 사람이 골목에서 가장 먼저 밀려났다.
그 가게들은 대개 1년을 넘기지 못했다. 망하거나, 장사가 되는 것처럼 보일 때 권리금을 높게 붙여 넘기고 떠났다. 애초에 고기를 팔러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1년 사이 손님들은 “맛이 변했다”며 하나둘 발길을 끊었고, 결국 골목 전체가 죽었다. 8년 동안 이런 골목을 다섯 번 넘게 봤다.
이상한 건 그 뒤였다. 가게는 망했는데 건물주는 손해를 보지 않았다. 망하면 망한 대로, 잘되면 권리금을 챙겨서 나갔다. 골목을 살린 건 고깃집 사장님들의 장사 감각이었고, 골목을 가진 건 건물주의 돈이었다. 감각이 떠나자 골목은 죽었고, 돈은 다음 골목으로 옮겨 갔다.
그 고깃집들은 내 거래처였다. 가게를 비우던 사장님들은 많이 속상해했는데, 그중 한 분은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라고 했다. 밀려난 사장님들의 운명은 거기서 둘로 갈렸다. 억울함을 안고 다른 골목에서 다시 고기를 굽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 골목이 뜰 무렵 또 다른 건물주를 만났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시간을 아무리 더해도 곱셈을 이길 수 없었다.
반면 장사하며 얻은 감각을 밑천 삼아 자기 처지를 바꾼 사람들이 있었다. 장사로 번 돈으로 건물을 사거나 회사의 주식을 사 모았고, 결국 월세를 받는 쪽으로 건너갔다. 같은 골목에서 같은 땀을 흘린 사람들이었다.
건물주에게는 돈만 있었고, 사장님들에게는 감각만 있었다. 끝까지 살아남은 건 둘 다 가진 사람이었다. 바닥에서 구르며 얻은 감각은 진짜였지만, 그 감각을 더 열심히 일하는 데만 쓴 사람은 제자리를 맴돌았고, 자본으로 바꾼 사람은 처지를 뒤집었다. 땀은 덧셈이고, 자본은 곱셈이다.
오염된 낙수효과
골목이 죽어 갈 때 무너진 건 골목만이 아니었다. 그 상권을 맡고 있던 내 실적도 같이 무너졌다. 고깃집이 하나 문을 닫을 때마다 내 거래처가 하나씩 사라졌고, 건물주가 권리금을 챙겨 떠난 뒤의 손실은 골목을 타고 흘러 내 실적표에까지 내려왔다.
폐업하는 날의 순서는 늘 같았다. 창고 구석에서 먼지 쌓인 재고를 꺼내 내 차로 옮기고, 먼지를 핑계로 콜록거리며 사장님과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았다. 활기찼던 그 공간이 낯설어진 만큼, 인사 끝은 늘 씁쓸했다. 골목의 손해는 그렇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내 차에 실렸다.
위에서 번 돈은 내려오지 않는데, 위에서 벌인 일의 손해는 고스란히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이걸 오염된 낙수효과라고 부른다.
재고를 싣고 돌아오는 길이면 늘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자본주의라는 사회가 그쪽과 이쪽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둔 건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 선 앞에서, 벽에 막힌 채 서 있는 것 같았다.
허리띠에서 시작된 곱셈
계좌는 세 번의 깡통으로 비어 있었고, 실적은 골목과 함께 무너져 있었다. 그 벽 앞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었다. 쓰던 돈을 줄이고, 줄인 만큼을 남겼다. 처음엔 그저 버티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버티는 동안 나는 내 상황을 제대로 보려고 애썼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변화 앞에서 펼쳐 온 책이 내게 남긴 건 답이 아니라 질문 하나였다. 지금 나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답은 불편했다. 나는 골목에서 밀려난 사장님들과 같은 처지였다. 매일 땀으로 돈을 더하는 사람이었고, 위에서 흘러내리는 손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더 열심히 뛰어 봐야 덧셈을 하나 더 얹을 뿐이었다.
내 처지가 보이고 나니 허리띠의 의미가 달라졌다. 졸라매서 남긴 돈은 버티는 데 쓸 돈이 아니라, 덧셈에서 곱셈으로 옮겨 갈 밑천이었다. 그래서 그 돈을 매달 시장에 넣기 시작했다. 깡통을 세 번 찬 손으로 다시 한 번에 크게 뛰어드는 대신, 허리띠에서 나온 돈으로 조금씩. 내 적립식 투자는 그렇게 시작됐다.
진짜 복리
막다른 곳에 몰린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역은 이렇게 말한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 주역
살아남은 사장님들이 한 일도, 허리띠를 졸라매던 내가 한 일도 이 문장 그대로였다. 같은 방식을 붙잡고 버티는 대신 방식을 바꿨고, 바꾸자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길을 오래 걸으면서 곱셈이 시작됐다.
복리 계산표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다. 매달 30만 원을 연 7%로 10년 부으면 얼마가 되는지는 계산기가 알려 준다. 하지만 계산기는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그 돈을 왜 넣어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세 번의 깡통 끝에 내 손에 남은 건 깨달음 하나였다. 가치는 내가 정하고, 기준은 내가 세운다는 것. 그 깨달음이 있었기에 골목이 무너지는 걸 보며 결국 자본이 이긴다는 걸 다시 확인하고도 주저앉지 않았고,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하는 내 처지도 낙담 대신 하나의 상황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앞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면, 뒤의 상황은 그저 불운으로 끝났을 것이다.
다만 복리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중간에 그만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조건을 세 번 어겼다. 욕심에 밀려 장기투자를 단타로 바꾸고, 공포에 밀려 시장가 버튼을 눌러 버렸다. 그럴 때마다 쌓아 온 시간은 0으로 돌아갔다.
적립식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났다. 지금도 하고 있고, 평생 할 생각이다.
하루 24시간은 오늘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나는 그중 일부를 덧셈이 아니라 곱셈에 걸어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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