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를 줄 알았다.
100권의 주식 책과 차트 지표들은 나를 세 번의 깡통으로 이끌었다. 제시 리버모어와 코스톨라니부터 엘리어트 파동이론과 일목균형표까지, ‘주식’이란 단어만 나오면 관련 서적이 아니더라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가능하면 원문으로 공부하려 했고, 캔들의 의미를 프린트해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놓고 달달 외웠다.
리딩방은 철저히 피했다. 대신 주식 유튜브를 뒤졌다. 매매기법, 차트 분석, 뉴스와 책에서 나온 인사이트. 나는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 공부했다.
어지간한 증권맨보다 많이 안다는 오만
ROE, PER, PBR, 펀더멘털을 공부했다. 매일 주요 뉴스를 들었고, 새벽에 일어나 미국 뉴스를 요약했다. 장중에는 한 시간 단위로 속보를 검색하며 내가 아는 테마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일부는 장기투자, 일부는 반기투자, 일부는 2주에서 한 달 스윙, 일부는 단타. 매일 종목과 이슈, 차트의 형태, 수익 현황을 기록했다. 사계절이 있듯 산업 구조와 정치인의 임기, 국가 산업을 연결 지어 커다란 흐름을 보려 했다. 어지간한 증권맨보다 내가 더 많이 안다고 착각하던 순간도 있었다.
망하지 않을 줄 알았다.
천천히 맞아 죽는 지연사
결론부터 말하면, 깡통을 세 번 찼다.
처음엔 순조로웠다. 단타로 매일 수익을 봤고, 주간 평균 승률 80퍼센트, 평균 수익률 15퍼센트를 주식일지에 기록했다. 나도 모르게 미래를 예측하는 오만을 저지르고 있었고, 머릿속으로 환상을 그리고 있었다. 스윙에서 장기투자까지 잡아두었던 비중이 조금씩 단타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렇게 첫 번째 깡통을 찼다. 바보처럼 웃어넘겼다.
“몇백만 원 안 되는데 뭐. 수업료 싸게 냈네. 구조도 알고 시스템화했는데 이 정도는 돈도 아니지.”
《돈의 속성》도 읽은 뒤였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위화감이 들었는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그랬다.
두 번째 깡통은 2년쯤 걸렸다. 이번엔 비중을 바꾸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장기투자와 분기투자는 단타로 옮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결국 조금씩, 아주 천천히 맞아 죽는 지연사였다. 그래도 그걸로 성장했다고, 수업료라고 생각했다. 다음엔 단타는 절대 하지 말아야지. 장기투자와 분기투자, 스윙만 해야지.
이성이 터져버린 순간
6개월이 채 되기 전에 스윙이 분기투자가 되었다. 1분 봉으로 스캘핑할 때는 손절을 칼같이 했는데, 그게 안 됐다. 지금 생각하면 미래를 예측하며 환상을 품은 시점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책상에 붙여두었던 고급 자동차 사진은 언제 찢어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철저히 지켜지던 만다라트 계획표도 어느새 그저 종이 한 장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등하교하는 길이라 시끄러웠을 텐데, 그날 차 안은 조용했다. 아니, 소리를 듣는 기관이 마비된 것 같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눌러왔던 인내가 봇물처럼 터졌다. 모든 감정이 울분이 되어 쏟아졌고, 이제 나도 모르겠다,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이 화가 되어 올라왔다. 프린트해 붙여놓고 외우던 그 캔들의 모양은, 그날 아무 의미도 없었다. 매수금액도 매도금액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체결이 됐는지조차 관심 밖이었다. 지난 고된 인내의 시간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는 듯이, 나는 시장가 매수·매도 버튼 위에 말 그대로 모든 돈을 던져 버렸다……
잔고가 없어지면 후련함과 함께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감정은 나를 아내에게 전화하게 했다.
“여보, 나 그냥 주식 안 하려고. 돈 다 버려버렸어.”
“야! 너 그러려고 주식 했냐.”
아내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던가……
뇌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날의 후유증인지, 강렬한 그 순간의 인상만 남긴 채 그해 그달의 기억 대부분이 사라졌다.
내 마음에는 기술적 반등조차 없었다.
벼랑 끝에서 다시 쥔 책
한여름 열병처럼 지나간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후회보다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 5년이었다. 하루 수면을 네 시간으로 통제해가며 쌓아 올린 시간, 내 미래의 전부일 거라 착각했던 노력이 흩어져 가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두려운 건 먼 미래가 아니었다. 당장 내일, 아니 한 시간 뒤의 내가 지금의 나를 손가락질할 것만 같았다.
부끄러웠다. 쏟아져버린 그 순간보다, 가만히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얼마를 넣어 얼마가 되면 노후가 준비된다는 계산보다 먼저, 그냥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상태로는 도저히 나아갈 수 없었다. 머리를 비워내려고 의미 없는 영상들로 시간을 보냈다. 책을 봐야 갈증이 풀린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그러지 못했다. 결국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주식을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내 안의 깊은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할 수 있는 선택 역시 책뿐이었다.
《현명한 투자자》. 이미 독파했던 책이었지만 다시 손에 쥐었다. 지칠 대로 지친 그 시절의 나는, 비관적이고 삐뚤어진 시선으로 글자를 읽어 나갔다.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원금의 안전과 적정한 수익을 노리는 것이 ‘투자’고, 그 외의 모든 것은 ‘투기’다.”
나는 지금까지 투기를 해온 것인가? 그토록 밤을 새우며 공부했는데도? 기업의 가치를 싸게 사라지만, 얼마가 진정 ‘싼’ 가격인가? 설령 적정가보다 싸게 샀다 한들, 시대와 사회가 그 기업을 외면하면 무슨 소용인가?
질문들이 머릿속을 흔들었고, 나는 거대한 혼돈에 휩싸였다. 비판과 회의감으로 얼룩진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다, 결국 책을 덮어버렸다. 인터넷을 뒤지고 수없이 검색해 봐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논리로 싸울 뿐이었고, 내 질문에 맞는 답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답이 없는 질문에서도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부터 받아들였다. 그리고 철학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대와 나라가 달라도 본질은 통한다고 했던가. 여러 사상이 비슷한 곳을 가리켰지만, 수천 년 전에 쓰인 한 문장만은 마치 내 이야기처럼 와닿았다.
가격표를 보는 나
어진 자는 그것을 보고 어질다 하고,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보고 지혜롭다 한다.
— 주역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어진 자는 어짊을 보고,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본다.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나. 나는 어진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나에게 그토록 잔혹했던 그 시간은, 내가 잔혹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과거의 나는 왜 나에게 그토록 잔혹했을까.
그러다 과거의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노력했던 그 시간은 잔혹함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서는 안 됐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구원하려면, 지금의 나는 이렇게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됐다. 그렇게 나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그 한 문장에 나는 구원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그 문장을 다시 읽자, 시장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뭐가 싸고 뭐가 비싼지는 고정된 팩트가 아니었다. 같은 시장을 보아도 관찰자가 어떤 프레임으로 비추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된다. 세상 모든 것은 절대적 사실로 굳어 있는 게 아니라 끝없이 변하며 얽혀 돌아갈 뿐이라는 이치가 머리를 쳤다.
가치는 계속해서 변한다. 워런 버핏이 보기에 싼 것도 내가 처한 상황에서는 비쌀 수 있다. 가격은 시장이 매긴다. 하지만 그 가격이 싼지 비싼지는 내 상황이 정한다.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는지, 얼마까지 견딜 수 있는지.
결국 봐야 하는 건 가격표가 아니라 가격표를 보는 나였다. 정보를 알고 있는 것과, 그 정보를 보고 내 기준을 세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니, 나는 정보를 기준이라 착각하며 살아왔다. 펀더멘털 지표는 지금 가격이 본래 가치에서 어디쯤 있는지 읽으려는 도구였고, 기술적 지표는 매수자와 매도자의 심리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잡으려는 시도였다. 파동이론은 군중이 그리는 궤적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찾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지표가 쓸모없어진 게 아니었다. 전부 미래를 맞히는 공식이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의 폭주하는 욕망을 읽어내려는 인간의 간절한 손짓이었다. 그 손짓들 사이에서 기준을 세우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런데도 왜 다시 투자인가
세 번의 깡통을 차고도 나는 왜 이 시장을 떠나지 못했을까. 부끄러움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월급만으로는 내 삶의 주도권을 지킬 수 없었고, 그 주도권을 지켜줄 수단은 자본뿐이었다. 그래서 방식을 바꿨다. 캔들을 외우는 대신 자본의 본질과 인간의 심리를, 동양의 사유와 수학과 과학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보니,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은 미래를 맞힌 사람이 아니었다. 욕망과 공포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자리를 세 번 이탈했다.
고독한 선비의 생존일지
지금은 정보가 넘치는 시대다. 질문 하나에 AI가 몇 초 만에 분석 보고서를 써주고,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법은 어디에나 널려 있다. 그런데 이 종목이 500원이면 싸고 2만 원이면 비싸다고 정해주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그러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기준을 정하는 순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책임은 나만 질 수 있으니 기준도 나만 세울 수 있다.
주식만 그런 게 아니다. 회사를 옮길지, 집을 살지, 다이어트를 언제 시작할지. 삶의 다른 모든 선택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선비가 그랬다. 읽은 책은 누구보다 많았지만, 세상이 뒤집히는 시절에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거부할지는 결국 스스로 정해야 했던 사람들. 치열한 역사 속에서 그들은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그 기준 때문에 고독했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기준을 정해주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방법을 보여주려 한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변화 앞에서 판단을 내릴 때 펼쳐 온 책, 주역의 틀을 빌려서. 그 안에는 정답이 없다.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있을 뿐이다. 이 글은 그 질문을 수학과 과학의 논리로 교차검증하며, 넘치는 정보 속에서 내 기준 하나를 세워 시장을 건너가는 고독한 선비의 생존일지다.
나는 다를 줄 알았다.
지금도 나는 다르지 않다. 다만 이제는 가격표보다 먼저, 그 가격표를 보는 나를 본다.
모든 상황을 스스로 찾고 싶다면 해설서가 있습니다.